💌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
오늘은 민주주의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선거, 헌법, 정부 기관 같은 제도들을 먼저 떠올리곤 하죠. 그런데 민주주의는 규정과 절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엔 사람들의 마음이 얽혀 있는 ‘감정의 설계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에서는 감정사회학의 대가 에바 일루즈가 ‘민주주의의 감정적 구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위치가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시민들은 공통된 감정을 공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희망으로 시작해, 실망과 질투, 그리고 때로는 분노로 이어지는 정서의 여정을 거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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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일루즈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연구책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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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일루즈는 인간의 감정을 사회적·역사적·경제적 맥락에서 분석한 감정사회학 분야의 선구자입니다. 원래 감정은 심리학자의 주특기 분야로 여겨졌지만, 일루즈는 감정이야말로 사회학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어요.
그의 대표작은 ‘감정 자본주의’ 연구인데요. 그는 ‘사랑’마저도 시장과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연애 앱에서 조건을 따지고, 이성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느끼는 과정까지도 사회적 규범과 경제 시스템, 문화적 코드가 작동한 결과라고 말하죠. 한마디로 ‘감정은 아주 사회적인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감정사회학이란 ‘내 마음의 작동원리’를 내면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찾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애에서 좌절하고, 일터에서 상처받고, 친구·가족, 정치 속에서 분노하거나 희망하는 그 모든 감정이 실은 사회 전체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냅니다. 그래서 일루즈는 “사랑도, 우울도, 분노도 절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분석은 우리가 늘 겪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감정의 힘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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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은 무엇을 합리적으로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내세가 아닌, 지금 여기서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죠. 희망은 사람들에게 ‘내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줬습니다. ‘꿈’, ‘야망’, ‘목표’, ‘성취’ 같은 단어가 사람들의 언어 속에 자리 잡았어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상상력이 생긴 겁니다. 희망은 마치 활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우리를 앞으로 밀어주는 힘이 되었죠. 그렇게 희망은 근대를 움직인 핵심 감정이 됐습니다.
유럽 민주주의 혁명인 ‘1848년 민중의 봄’ 때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 형제애에 대한 희망으로 들끓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수많은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의 물결 속에서 지식인이든 노동자든 모두 ‘더 나은 세상’을 꿈꿨습니다. 이건 정치 운동일 뿐 아니라, 희망이라는 감정이 움직인 역사였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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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당시를 묘사한 앙리 펠릭스 에마뉘엘 필리포토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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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며 희망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연결됐습니다. 민주주의야말로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는 신념을 키워주는 체제였죠. ‘아메리카 드림’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1931년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미국 역사학자)는 ‘모든 남녀가 누구든 자신의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고, 출생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인정받는 사회질서를 바라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더 나은 삶, 더 큰 기회, 더 공정한 세상을 향한 꿈이었죠.
하지만 이 희망이 사라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학자들은 이를 ‘절망의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알코올, 마약,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니까요. 이는 경제적 기회가 막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감정, 다시 말해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이에요. 현실이 힘들어도 희망이 있으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반면 희망이 없으면, 미래를 상상할 수 없고, 삶을 견디기도 힘들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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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은 희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감정이에요. 꿈은 좌절을 겪고, 그 원인도 개인의 한계 탓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일 때가 많으니까요. 예컨대 1930~40년대 미국에서는 평범한 계산대 직원이 대형 유통기업의 관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학력, 집안, 배경이 없으면 좋은 일자리는 커녕 출발선에 서기도 힘듭니다. 교육이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면서 상류계급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구조가 공고해졌습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이 좌절을 경험하고, 그 실망은 아쉬움을 넘어 자존감까지 뿌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미국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국 같은 곳에서도 상류계급은 부모의 자원으로 훨씬 수월하게 성공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중산층조차 이제는 실망이라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거예요. 학벌과 배경이 없는 이들은 점점 좁아지는 기회의 문에서 밀려나며 똑같이 차별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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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민주주의의 에너지이지만, 동시에 채워질 수 없는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집니다. 무언가 나아질 거란 환상과, 실상은 바뀌지 않는 현실을 오가며 마음 한 켠에 씁쓸한 허탈감을 품게 되는 것이죠. 이런 실망이 오래 지속되면 무기력증으로 나타납니다. 삶이 뭔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기대를 갖기도 점점 더 버겁게 되는 상태말입니다.
따라서 실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또 실망의 경험이 나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돌아보는 일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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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질투: 비교와 경쟁, 그리고 끝없는 조바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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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란 뭘까요? 심리학자들은 질투란 남이 가진 능력·성공·소유를 내가 갖지 못했을 때, 그것을 갖고 싶거나 혹은 상대방이 아예 그걸 못 가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질투를 부정적으로 봤어요.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게 ‘죄’였던 거죠. 그런데 18세기쯤부터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철학자 만더빌은 ‘꿀벌의 우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의 욕망과 질투, 심지어 사치와 게으름 같은 개인의 이기심도 전체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질투가 경쟁을 부추겨 사람을 더 노력하게 하며, 그것이 사회 전체의 동력을 만든다는 겁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질투는 훨씬 더 익숙한 감정이에요. 정치가 평등을 약속할수록, 사람들은 ‘나도 저 사람만큼 살 권리가 있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평등하지 않기에, 곧바로 “왜 나는 안 되고, 저 사람은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제도는 누구나 평등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꿈을 심지만, 현실에서는 계급·재산·명예의 불균형이 있는 거죠. 그래서 질투는 남과의 비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적 불만, 좌절, ‘나는 왜 안 되지?’라는 씁쓸함으로 번집니다.
지금 청년 세대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예일대 학생들은 명문대에 들어가서도 끝없이 경쟁합니다. 여러 동아리에 지원해 합격과 탈락을 반복하며, ‘난 어디쯤일까’라는 조바심에 시달립니다. 이 경쟁을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내고, 서로 질투와 불안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심리학 연구를 보면, 내가 얼마나 버는가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가 행복감과 만족감에 더 영향을 미친다고 해요. 예컨대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도 주변이 다 150만원을 받으면 행복하지만, 250만원을 받아도 주변이 300만원이면 불안해집니다. 이처럼 ‘비교의 질투’는 우울, 불안, 자존감 하락, 그리고 기업의 생산성까지 곳곳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질투는 사회와 경제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힘이지만, 지나치면 마음의 병까지 남길 수 있어요. 민주주의 시대의 질투, 그건 ‘나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과 ‘왜 나는 아니지?’라는 좌절이 맞물려 만드는 복잡한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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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는 ‘정의’와 ‘공정’이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우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은 본래 공평해야 한다’고 기대하면서 자랍니다. 지위가 높든, 직업이 뭐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을 것이라고 믿는 거죠. 그래서 불평등이나 차별을 경험할 때, 분노라는 감정이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패자’가 됐다는 자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분노를 키웠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 분노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도덕적 반란’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부당하게 벌을 받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부당하게 특혜를 받는다.” 이런 감정이 정치적 내러티브로 순환하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결합합니다. 실제로 부정적 감정 중에서도 분노는 포퓰리즘 투표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인 것으로 여러 연구에서 나타났어요. 페미니즘이나 기후 운동 같은 사회운동에서도 분노가 강한 동력입니다. ‘이건 정의롭지 않다,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집단적 분노가 실제 행동까지 이끌죠. 최근 노르웨이에서도 기후 시위 참여 의향에서 분노가 가장 큰 예측 변수로 나타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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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정치적으로 다른 집단도 분노의 언어로는 놀랄 만큼 닮아간다는 점입니다. 좌우 진영 모두 ‘내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는 서사로 분노를 공유하고, 또 그 분노가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모두가 ‘우리는 평등하다’는 기대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질 때, 나만 제외되고 있다고 느낄 때, 분노는 폭발적으로 커집니다. 요즘은 학교도, 직장도, 심지어 고학력 특권층마저도 실질적 ‘배제’를 경험합니다. 교육받은 사람이 늘었지만, 그에 맞는 일자리나 권력은 늘지 않으니, 곳곳에서 ‘내가 소외됐다’는 분노가 터져 나오는 거죠.
그래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희망·실망·질투·분노 같은 감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분노는 개인의 불쾌함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전체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이 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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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주제로 열린 제16회 아시아미래포럼에서 에바 일루즈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연구책임자(왼쪽 둘째)가 ‘사랑과 혐오, 민주주의를 흔들다’란 주제의 기조발제를 한 뒤 패널들과 ‘혐오시대, 민주주의를 다시 묻다’를 주제로 원탁토론을 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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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미래포럼에서 ‘민주주의와 감정’을 다루기로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에바 일루즈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심리 차원이 아닌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산물로 분석해 온 감정사회학의 대가이자, 감정이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고 시대를 흔드는지를 누구보다 깊이 탐구해온 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습니다. 포퓰리즘이 단순한 정치 현상이 아니라, 배제·분노·모욕·상처와 같은 감정의 집단적 축적이 정치화된 결과임을 치밀하게 드러내고 있었거든요. “감정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흔드는가”, “정치적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을 명확히 짚어주며, 포럼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연구가 이번 포럼의 핵심 문제의식과 선명하게 맞물린다는 확신이 들자, 우리는 이스라엘과 프랑스를 포함해 그가 속한 여러 대학과 기관의 이메일을 일일이 찾아 조심스럽게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몇 주간 아무런 회신이 없어 단념하려던 바로 그때, 짧은 한 문장이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다.” 그 문장을 읽던 순간의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던 그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방한 준비 과정에서 그는 서울의 몇 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그중 가장 뜻밖의 장소는 ‘서대문형무소’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가 투옥된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고문, 투옥, 저항, 그리고 자유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죠. 외국 방문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장소를 콕 집어 언급했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한국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지 느끼게 해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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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피커스> 어떠셨나요?
희망, 실망, 질투, 분노. 일루즈가 들려준 민주주의의 네 가지 감정은 우리의 정서적 지도입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느냐가 중요하죠.
일루즈는 감정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의 분노나 실망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분열을 조금이나마 좁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요? 스피커스 구독자분들의 생각을 스리슬쩍 알려주기를 통해 나눠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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