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요. 어릴 적 정말 궁금했습니다. 힘이 센 존재에 대한 본능적 관심은 동물 세계를 넘어 지구촌 권력과 질서로 이어졌습니다. 우습게 볼 게 아닌 게 호기심 많던 또래 아이들은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우주로까지 상상력을 확장하곤 했죠. 무시무시한 전쟁의 고통은 생각도 못 한 채 미국과 중국이 한판 붙으면 어느 나라가 이길지 목소리 큰 친구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울 때였습니다.
철이 들면서 보고 듣는 세상은 넓어졌지만 외교, 안보라고 하면 되레 더 거창하게 들립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을 듯한 건조한 언어로 중계되는 국제정치판은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 얘기로 들릴 때가 많지 않나요.
그런데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유라시아 반대편에 사는 우리 삶에도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가 나타났습니다. 날갯짓으로 생긴 고물가, 고금리의 충격에 살림살이도 팍팍해졌습니다. 지난달 중동에서 터진 전쟁은 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벌써 불안합니다. 다음 또 그다음 차례는 어디일까요?
‘예정된 전쟁’. 앨리슨 전 차관보가 6년 전 펴낸 책 제목인데 좀 섬뜩하지 않나요. 이 책은 패권국 미국과 도전국 중국의 피하기 어려운 충돌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틀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반세기 넘게 미 국방부 고문과 국방정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해왔습니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을,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냈죠. 현장과 이론의 경계선을 수시로 넘나들었습니다. 넓은 시야와 탁월한 통찰은 세계를 무대로 한 체스판에서 체스를 둬본 그의 경력에서 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30년에 걸쳐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과 하버드 벨퍼 과학 및 국제문제센터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의 여러 영향력 있는 저서 가운데 가장 대표작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결정의 본질’일 겁니다. 외교안보 쪽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입니다. 또 ‘핵테러리즘’, ‘리콴유가 말하다’ 등 펴내는 책마다 세계 곳곳에서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100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제자이기도 한 앨리슨은 그와 함께 세계 최고 외교안보 전문가로 꼽힙니다. 그의 냉철한 분석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너무 자주 망각하는 우리에게 위기를 알리는 파수꾼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굴러왔는지 궤적을 연구한 앨리슨은 바퀴가 어떤 경로를 밟을지 예측합니다. 또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장애물을 피할 수 있을지 말합니다. 그의 강연을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눠 짚어봤습니다.
①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미-중 패권 각축 경로는?
지금으로부터 2623년 전 죽었던 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를 아세요?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 배우신 분이 많을 겁니다. 스파르타가 맹주였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이 벌인 고대 ‘국제전’을 다룬 책입니다. 전쟁의 승자는 스파르타 쪽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테네 세력의 성장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고양된 경각심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에 주목한 앨리슨은 빠르게 부상하는 세력이 기존 지배권력을 위협하거나 교체하려고 할 때 벌어지는 현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패권국과 도전국이 전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덫을 말합니다. 지난 500년간 전 세계에서 16번의 패권국과 도전국의 충돌이 있었고 12번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78년 동안 강대국끼리 전쟁이 없는 시기를 그는 ‘이례적 평화’라고 말합니다. 미-소 간 냉전이 끝나고 이후 도래된 미국 중심 일극 체제도 이제 중국의 부상으로 깨졌습니다. 그는 제임스 매티스 전 미 국방장관의 말을 빌려 “미국이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공중, 지상, 해상, 사이버 공간에서 도전국 중국과 사활적 경쟁이 시작됐다는 뜻입니다.
패권 각축을 벌이는 미-중이 ‘16번 중 12번’의 전철을 밟을까요? 앨리슨은 두 나라가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 “전쟁할 가능성이 굉장히 커 보인다”고 말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팽창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공포가 만들어낸 충돌이겠지요. 자료: 플리커
② 공포의 균형과 협력적 경쟁
2차 세계대전 뒤 강대국끼리 충돌을 막아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였습니다. 한쪽이 핵무기로 공격하면 다른 쪽도 보복하면서 결국 둘 다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공포가 전쟁을 막아줬습니다. 이는 상호확증파괴(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전략입니다. ‘미친’이란 부정적 뜻을 지닌 이 약자는 적대적 쌍방간 ‘공포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해 줍니다. 사용 가능한 미국의 핵탄두는 3700개가 넘고 중국도 350개에 이릅니다. 두려움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를 수 없도록 묶어주는 효과입니다. 개혁개방에 이어 세계무역질서에 편입한 중국이 미국과 긴밀한 ‘경제적 매이드’(MAED)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도 충돌의 가능성을 줄여줬습니다.
위기를 극복한 경험도 있습니다. 미 본토에서 불과 200km 떨어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던 소련과 충돌할뻔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입니다. 이듬해 존 에프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은 한 연설에서 “다양성 있는 안전한 세상”을 말했습니다. 쉽게 풀면 차이를 종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대로 그들은 그들 대로 평화롭게 살면 되지 않냐, 라는 겁니다. 중국 또한 비슷한 역사적 기억이 있습니다. 서기 1005년에 요(거란)를 힘으로 압도할 수 없던 송은 요와 협정을 맺어 120년간 평화를 누렸죠. 두 역사는 상대를 인정하고 공존한 사례입니다.
앨리슨은 이를 ‘협력적 경쟁’으로 부릅니다.예를 들면 애플과 삼성의 관계입니다.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과 경쟁하지만 부품시장에서는 삼성의 ‘큰손’입니다.
③ 의도하지 않은 전쟁
패권 각축을 벌이는 미-중이 경쟁적이면서도 협조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면서 중국은 미국 주도 세계무역질서에 합류해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미국과 꽤 오랫동안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중국이 너무 커지자 미국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꼈던 스파르타처럼요.
미-중 관계에서 이미 ‘협력’은 줄고 ‘경쟁’이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변곡점이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는 사활적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경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당신이 읽고 들어온 미-중 관계를 다룬 기사들은 대부분 이 파편들입니다.
‘현실주의자’처럼 보이는 앨리슨은 ‘해피 엔딩’에 붙잡혀 있지 않습니다. 상호의존도는 낮아지고 도전국과 패권국 간 긴장도가 높아진 지금 통제할 수 없는 제삼자 변수와 맞물린 우발적 충돌에 주목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습니다. 세계열강이 참전하면서 불 붙은 전쟁으로 무려 2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한국전쟁 전 미국과 전쟁을 벌일 의도가 없었듯 미국의 트루먼 또한 중국과 부딪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역사입니다. 앨리슨은 이런 ‘의도하지 않은 전쟁’의 재발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21세기 코린트는 어디일까요
기원전 431년에 시작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충돌은 전혀 엉뚱한 곳이 도화선이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코린트와 케르키라가 지금의 알바니아 영토에 속한 에피담노스란 도시를 놓고서 벌어진 충돌에서 시작합니다. 페르시아까지 개입한 전쟁은 28년간 이어지다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이후 국력이 쇠해진 스파르타도 31년 뒤 망합니다.
21세기 코린트는 어디가 될까요? 앨리슨은 대만(타이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어느 곳이 트리거(방아쇠)가 되더라도 끝은 모두에게 비참합니다. 앨리슨은 수백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일방적 승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미-중의 충돌은 전 세계 특히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입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한국은 두 초강대국의 분쟁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릴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 미-중 두 나라가 제한적으로 충돌했던 한국전쟁은 1953년 전쟁을 잠시 멈춘(정전) 상태로 아직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11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앨리슨 전 차관보의 강연 뒤 손석희 전 제이티비시(JTBC) 앵커와 대담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손 전 앵커의 세 번째 질문에 답한 뒤 앨리슨은 ‘워싱턴과 전화 연결’을 이유로 예정된 시간(11시)에 맞춰 화상 대담을 멈췄습니다. 앞 세션이 좀 길어지면서 시작 시간이 늦어진 탓이었습니다. 강연자가 떠난 뒤 아쉬울 수 있었던 무대를 손 전 앵커가 순발력 있게 자신이 준비한 미처 묻지 못한 질문들을 청중에게 들려주면서 마무리했습니다.
저도 어렵게 앨리슨과 인터뷰를 성사시킨 뒤 질문 다섯 개를 추려 보냈지만 답은 두 개만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약속한 만큼만 답을 보냈고 저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기대 섞인 추가 질문을 보냈습니다. 에누리와 덤에 익숙한 나라에서 살아온 저는 살짝 서운한 맘이 들었지만 ‘약속한 만큼’ 꼭 지키는 그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손 전 앵커가 못다 한 질문 가운데 인상적인 게 하나 있습니다. 그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 일인데요. 한 포럼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언급되면서 대만이 거론됐다고 합니다. 대만의 언론들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답니다. 대만을 위험 지역으로 서방 언론이 몰아가고 있다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외신들이 당장에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것처럼 기사를 쏟아내거나 미-중의 무력 충돌이 한반도를 무대로 일어날 것이란 예측을 할 때마다 우리 또한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수 천만명이 사는 땅의 운명에 제삼자가 쉽게 왈가왈부하는 게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스피커스를 읽은 뒤 오늘은 주식, 직장, 노후, 부동산 등 삶의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이 땅의 평화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번 <스피커스> 어떠셨나요?
우리는 지금 어떠한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어떠한'을 채울 수 있는 형용사는 사람과 집단마다 다를 겁니다. 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도 다를테고요.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등의 주제에 관한 담론들이 있지만,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다 보면 이런 거대한 담론은 말의 유희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삶에 분명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앨리슨 전 차관보의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이번 <스피커스>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사회를 다시 고민하는 시간을 만들었길 바랍니다.
참, 앨리슨 전 차관보의 강연을 미처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영상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스피커스에 대한 의견도 남겨주세요. 정성껏 읽고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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