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언니의 자급자족 프로젝트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도시 인구 비율은 92.1%에 달합니다. 국민 10명 중 9명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는 셈이죠. 도시는 과밀화로 몸살을 앓고 있고, 우리나라의 농업 기반은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고 해요.
도시농업은 1992년 서울시 농촌지도소에서 주말농장 운영을 시작으로, 2000년대 들어 도시농부학교와 아파트 옥상이나 베란다에서 채소를 기를 수 있는 상자텃밭·베란다텃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2009년 농촌진흥청에서 도시농업팀이 신설됐고, 같은 해 경기도 광명시가 도시농업 조례를 처음 제정한 뒤 앞다퉈 지자체들이 도시농업 활성화 조례를 제정합니다. 2011년에는 도시농업법이 제정되며 제도적 기반도 마련됐고요. 소수의 개별 시민·단체 운동으로 시작된 도시농업이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면서 참여자 수와 텃밭 면적은 크게 확대됩니다. 그렇게 도시농업은 단순한 텃밭 가꾸기를 넘어 도시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죠.
사실 농업은 단순히 식량 공급만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은 씨앗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전승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땅과 연결된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어요. 도시농부들은 이러한 농업의 가치를 도시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있을까요? 이번 스피커스는 생태지향·가치지향적 성격의 도시농업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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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7~8일 서울 종로구 카나비요르크에서 열린 ‘도시언니들의 자급자족 도전기-미미미(美米味)>’ 현장 모습. 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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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나이 43세 직장 경력 도합 60년 도시농사 경력 도합 37년. 네 명의 여성 이야기.
이 흥미로운 숫자들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스피커스는 지난해 12월 7~8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 도시언니들의 자급자족 도전기-미미미(美米味)(이하 ‘미미미’)> 전시회를 찾았습니다. ‘미미미’전 (展)은 본업을 가진 직장인이면서 자급농사를 결심하고 쌀농사에 뛰어든 네 여성의 1년간의 여정을 담았습니다.
참, 여기서 ‘미미미’는 각각 아름다운 삶(美), 토종쌀(米), 미식(味)을 뜻하고 있어요. 전시는 직장인이자 농부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한 네 명의 도시 여성의 이야기(美), 기후위기 시대의 토종쌀이 갖는 의미(米), 그리고 수확한 쌀을 맛보는 경험(味)으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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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미 전시회는 ‘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 (이하 ‘연구회’)’가 기록한 토종쌀 농사기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반농반X’라니!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데요. 이는 일본의 생태운동가 시오미 나오키가 제안한 개념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전업농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농사와 다른 일을 병행하는 삶을 뜻하죠. 여기서 ‘반X’는 자신의 특기나 재능을 살려 하고 싶은 일을 세상을 활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연구회는 이 ‘반농반X’라는 개념을 도시 생활에 맞게 재해석했어요. 농사와 본업을 병행하면서도 도시에서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귀농귀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골에 땅을 살 만큼의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도시에서 직업을 유지하면서 쌀을 포함한 주곡 농사를 짓는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연구회의 멤버인 최유리씨는 전업 농부가 되지 않아도, 그러니까 생활 공간과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도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식탁을 책임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먹는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면, 좀 더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든든한 무기를 하나 가질 수 있단 기대가 담겨 있어요.
최유리씨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도시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농사짓기 자체만큼이나 이를 공감할 수 있게 알리고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생태적인 가치를 문화적 체험으로 풀어내거나, 요즘 말로 ‘힙한 것’으로 메시지화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번 미미미 전시회도 그런 시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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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인근 논에서 지난 1년간 토종벼 농사를 지었다. 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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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회는 1년간 토종쌀을 재배했습니다. “일반미는 이미 많은 농부가 재배하고 있으니, 자급자족하려는 농부에게는 일반미보다 생태적 가치가 있는 토종 벼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최유리씨의 설명입니다. 다만 그는 토종벼 선택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식량자급, 식량안보, 종자주권, 생물다양성을 위한 현지 보존, 전통의 복원과 보존, 기후위기 대응, 미식 추구 등 각자의 농사 목적이 다를 수 있다는 거죠.
최유리씨가 토종벼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토종쌀의 보급과 대중화입니다. “먹는 것은 최대한 빈부격차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공공재여야 해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수매도 없고 소매시장만 있는 상황에서 토종쌀은 일반쌀의 최소 5배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토종쌀이 본의 아니게 독점적이고 비싼 농산물이 된 데는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토종씨앗은 우리나라 기후와 땅에 30년 이상 적응해 온 작물의 씨앗을 의미합니다. 오랜 시간 우리 땅에서 농부들의 손으로 길러진, 우리나라의 기후와 토양에 가장 잘 적응한 작물이죠. 그만큼 기후변화와 위기에 다른 씨앗보다 잘 적응할 가능성이 큽니다. 종자회사의 씨앗과 달리 토종씨앗은 자가채종이 가능해서, 농부가 씨앗을 거두어 다음 해에 다시 심을 수 있습니다. 길러서 먹고, 채종하고, 다시 심고, 또 길러서 먹는 지속가능한 순환이 가능한 거죠.
토종벼는 현대 농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키가 크고 까락(벼수염)이 길어 기계로는 수확이 쉽지 않고, 제초제와 화학비료 없이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기에 노동력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런 ‘불편함’이 토종쌀의 높은 가격으로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토종벼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 생태계의 관계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토종벼는 단순한 농작물이 아닌, 우리의 먹거리 주권과 생태적 삶의 가능성을 묻는 살아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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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는 총10종의 토종벼를 무비료/무농약/손 김매기와 우렁이의 도움을 받는 제초 방식으로 재배했다. ‘미미미’전(展)에서 각기 다른 매력이 있는 10종의 토종벼가 소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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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회는 10가지 토종벼를 선택해 논에서 재배했습니다. ‘ 토종씨드림’에서 씨나락을 구매해 직접 육묘한 다섯 품종 (한원식밭벼, 한원식알찬벼, 붉은차나락, 보리벼, 멧돼지찰벼)과 ‘ 우보농장’에서 나눔 받은 모종 다섯 품종 (노인다다기, 쇠머리지장, 흑갱, 대관도, 조동지)을 무비료, 무농약으로 재배했어요. 제초제 대신 손으로 김을 매고, 우렁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맛과 모양이 균일화된 일반쌀과 달리, 토종쌀은 각각의 품종마다 색깔과 형태, 맛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전시회 현장에서의 토종쌀 시식은 마치 와인 테이스팅을 연상케 하는 경험이었어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품종 중 하나는 ‘멧돼지찰벼’였습니다. 콩밥 같기도 하고 팥밥 같기도 한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는데요, 거무튀튀하고 기세등등한 까락만 봐도 이름의 이유가 이해됐어요. 멧돼지의 등이나 배에 있는 얼룩무늬와 색깔이 닮은 기다랗고 매우 뻣뻣한 까락을 가진 이 품종은 전남 장흥의 토종벼 농부인 이영동씨가 자연변이에서 육종했다고 합니다. 쌀알마다 줄무늬가 또렷했는데, 도정한 쌀에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스피커스가 가장 맛있게 먹은 쌀은 단연 ‘조동지’였습니다.☺️ 찰기가 흐르면서도 구수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는데, 시식하는 내내 그 탁월한 밥맛에 자꾸 숟가락이 가더라고요. 1886년 경기 여주의 농부 조중식씨가 발견한 이 품종은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고 합니다. ‘동지(同知)’는 정5품 관직을 뜻하는데, 당시 발견자의 성과 명예 관직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흥미롭게도 토종벼 이름 가운데 개인 농부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은 조동지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토종쌀의 역사와 이름의 유래를 알아가며 다양한 맛을 경험하다 보니, 우리 식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와인이나 커피가 품종과 산지에 따라 다양하게 즐겨지듯, 쌀도 품종별로 개성 있는 맛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양한 요리와 토종쌀의 페어링, 계절별 토종쌀 추천 등 우리 밥상의 깊이를 더하는 새로운 식문화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맛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토종쌀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되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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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는 상황에서 ‘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는 가장 기본적인 먹거리인 ‘쌀’을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며 도시에서 자급자족의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농반X자급자족연구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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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회는 올해 경기도 파주에서 토종벼 농사를 이어갑니다. 다만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기존 멤버들 중 최유리씨만 유일하게 참여한다고 해요. 그는 매해 기수제로 커뮤니티를 꾸려갈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지만 계속 참여하기 어려운 개인의 사정이 있을 수 있잖아요. 작별의 문을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헤어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말이죠. 어쨌든 함께 벼농사의 전체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벼를 재배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면 된 거죠. 그렇게 자립할 수 있는 농부가 될 수 있길 바라요.”
최유리씨의 이야길 들으며 함께할 때 서로의 안녕을 바라고, 헤어짐에도 건강한 안녕을 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가치를 함께 나눌 동료들을 찾아 최유리씨는 함께 기르고, 함께 밥 먹는 2025년 토종쌀 크루를 모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심 있는 스피커스 구독자분들께선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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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피커스> 어떠셨나요?
겨울방학을 마치고 스피커스가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봄을 기다리며 이번 스피커스는 초록의 기운이 느껴지는 도시농업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도시에서의 자급자족이 마냥 쉬울 수는 없지만, 스스로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되어보는 경험은 우리에게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기회를 줍니다. 느리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하지만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가는 도시농부의 이야기가 구독자분들께도 영감이 되었길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와 첫 걸음을 내딛는 용기란 생각을 합니다. 베란다의 작은 화분에서, 주말농장의 한 평 땅에서, 혹은 도시 곳곳의 작은 텃밭에서, 구독자분들만의 초록 이야기가 시작되길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와 용기를 안고 2025년 스피커스는 격주로 찾아뵙겠습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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